후쿠시마 핵발전소 수습작업에 70%가 지역주민
피폭노동은 죽음이 전제된 노동, 일반 산재와 달라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또 한 사람 간다
비통하고 통탄스러운 핵발전소
자식 학비 벌려고 핵발전소관리구역에서
오래 일한 친구가 가버렸네
- 사토 유테이 시집 『시퍼런 빛』 가운데
위 시는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오쿠마정에 거주하는 주민이자 시인인 사토 유테이 씨가 쓴 단가(短歌)다. 핵발전소 방사능에 피폭되는 위험한 노동은 일용직노동자나 지역주민들이 대거 투입된다.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방사능에 피폭돼 죽은 사람은 흔히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피폭노동자를 생각하는 네트워크’ 활동가로 있는 나스비씨(51세)가 한국을 방문해 12월 15일과 16일 각각 부산과 울산에서 이틀 동안 ‘핵발전소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통역은 김복녀 소장(원불교 환경연대 탈핵정보연구소)이 맡았다.
나스비 씨는 강연에서 일본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피폭노동자 실태를 알렸다. 또 피폭노동은 일정 비율의 노동자가 죽는 것을 전제로 일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노동과 다르다고 했다. 그는 “탈핵진영이 탈핵을 위해 피폭노동자를 ‘이용’하면 곤란하다”며, “핵발전소 노동자와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고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스비 씨는 1986년부터 도쿄의 일용직노동자 거리인 산야에서 노동자지원활동을 했고,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 이후 ‘피폭노동자를 생각하는 네트워크’를 결성해 노동상담 등을 하고 있다. 아래는 12월 16일 울산시민연대 교육관에서 열린 나스비 씨의 강연 내용을 요약·정리했다.
△ 지난 12월 16일(금) 울산시민연대 교육관에서 ‘핵발전소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다-
일본 피폭노동자를 생각하는 네트워크 나스비 초청강연회’가 있었다. 사진은 나스비
씨(가운데)와 통역하는 김복녀 소장(왼쪽)의 모습 ©용석록
죽는 선량치 680밀리시버트에 피폭당한 노동자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는 결코 최악의 사고가 아니다. 몇 가지 우연과 행운이 겹쳐 이정도로 끝난 것이다. 수소폭발로 인한 압력용기 폭발을 막기 위해 벤트(VENT, 방출) 작업을 해야 했다. 도쿄전력에 매뉴얼이 있었지만, 다들 잘 이해하지 못해 방출이 어려웠다. 벤트작업은 전기를 사용해서 밸브를 열게 돼 있는데 당시 블랙아웃(정전) 상태였기 때문에 매뉴얼대로 할 수 없었다. 도쿄전력은 건물 안으로 결사대를 투입해 손으로 벤트 작업을 했다. 이 사람은 680밀리시버트(mSv)의 피폭을 당했다. 죽는 선량치다.
누가 피폭노동자가 되는가
제염(오염 제거)작업과 같이 가장 피폭량이 많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용노동자와 핵발전소 입지 지역주민이다. 후쿠시마의 경우는 70% 가량이 지역주민이다. 핵발전소로 인해 생활과 지역경제가 유지되던 생활이었기 때문에, 현지 주민은 피폭노동의 문제를 말하기 어려운 구조가 있다. 사고 후 수습작업에 참여한 지역주민은 소수였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이 후쿠시마 현지 분들이다. 지역을 위해 수습작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주한 지역에 일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설주택이나 피난처에 가족을 남기고, 홀로 작업원 숙소나 이와키 가설주택에 거주하면서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 다니고 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핵발전소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인권은 없다…“방호복 안에 대변이든 소변이든 다 싸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오염수는 계속 나오고 있고, 대안 없이 임시방편으로 일하고 있다. 안전조치 없이 작업한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안전조치 없이 공정을 우선시하며 일을 시켰다고 사죄하기도 했다. 이후에 1만 엔(약 10만원)이던 위험수당을 2만 엔으로 올리고, 식당을 지으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했다고 언론에 내보냈다.
하지만 중층 하청구조 때문에 2만 엔을 받은 일용노동자는 없다. 또한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도쿄전력 직원들이다. 제염작업이나 오염수 처리 등에 종사하는 작업자들은 완전방호복을 입는데 세 겹의 장갑에 테이프 감고, 장화 신고, 그 자체가 방사능 오염물질이라서 식당을 이용하기 전에 벗어야 하고, 방사능 측정을 해야하고…… 현실적으로 식당 이용이 불가능하다.
업자들은 노동자가 화장실 가는 것도 용납 안 한다. “방호복 안에 대변이든 소변이든 다 싸라”고 하고, 실제 그런 노동자도 있다. 줄에 매달려서 용접하던 한 노동자는 하루에 13시간 일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하루 쉬겠다”고 했더니 사장이 “숙소에서 나가라”고 했다. 해고된 것이다. 내가 활동하는 ‘피폭노동자를 생각하는 네트워크’에는 해고되고 살 집이 없어서 상담하러 오거나,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문제, 산업재해 등 온갖 상담이 들어온다.
죽음 예견하고도 피폭노동 시키는 현실…2만 명 가운데 9백명만 국가가 건강진단
후쿠시마사고 이후 수습작업에 종사한 노동자는 2만명이 넘는다. 그 중에 국가가 제대로 책임지고 건강 진단하는 사람은 9백명 정도다. 후쿠시마사고 이전에는 피폭노동자 50만 명 가운데 11명만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산업재해 인정 질병은 백혈병, 폐암, 갑상선암 등 5가지만 인정하다가 최근에서야 다발성골수종(악성종양)도 산재 인정 항목에 추가했다.
일본 정부는 국가가 특례 긴급작업이라고 규정한 수습작업에 종사한 노동자가 50밀리시버트 이상 피폭을 당하면 내장 검사, 100밀리시버트 이상 피폭당하면 암 검사를 실시한다(일반인 방사선 피폭 연간 허용기준치는 1밀리시버트, 편집자 주). 그러나 50밀리시버트 미만의 사람에게는 국가가 직장 건강검진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사능 피폭선량은 20밀리시버트 미만이라고 하더라도 인체는 영향을 받는다. 핵발전소를 가동하려면 0.1%의 노동자가 암으로 죽는다는 것을 미리 용인할 수밖에 없으며, 미리 사망을 예상하면서도 일을 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산업재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피폭노동자들에 대해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적으로 피폭노동자에 대한 관심 없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 이후 그 안에 남아서 일한 사람들, 목숨 걸고 벤트작업하러 들어갔던 사원, 언론은 그들을 영웅시했고, 사고 직후에 저를 포함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TV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피폭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직후 ‘피폭노동자 자기방위 매뉴얼’을 만들었다. 매뉴얼 제작 과정에 다양한 관계가 생겼고, 피폭노동 문제를 운동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피폭노동 네트워크’다.
매뉴얼을 만들 때 피폭노동에 관해 조사했는데 1970~80년대 르포밖에 없었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부터 1년 정도는 언론이나 국민도 중층 하청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같이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하지 않고, 왜 일하러 가느냐고 한다.
피폭노동문제에 대한 대응은 핵발전소 보유국가들 가운데 어느 나라도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독일처럼 최근 반핵운동이 활발해지고 핵발전소 제로 선언을 해놓은 나라도 역시 피폭노동문제는 홀대받아 왔다.
중층 하청구조, 그에 따른 임금 빼먹기, 부실한 안전대책, 그리고 사업 시작 당초부터 지금까지도 개선되지 않는 제염작업에 관한 문제 등 피폭노동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있다.
용석록 객원기자
탈핵신문 2017년 1월호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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