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생존을 정부에 맡기지 마라”
시민방사능감시센터 발족… “시민의 편에 서겠다” 선언
이지언 편집위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절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방사성 세슘은 600년 이상 독성이 사라지지 않죠. 우유나 녹차를 비롯한 일본산 수입 식품에 대해 정부가 방사능 오염을 조사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적 반핵운동가인 헬렌 캘디콧은 한국 청중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시민방사능감시센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한 손에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다리나 팔 없이 태어난 아이들의 사진이 들려있다.
호주 출신의 소아과 의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 단체인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의 공동창립자인 헬렌 캘디콧은 방사능의 의학적 위협을 전통적으로 무시해오던 정부와 핵 산업계의 독점적 해석에 맞서 시민들을 교육하는 데 앞장서왔으며, 핵무기와 핵발전소 반대 운동의 ‘전설’로 알려졌다. 그가 지난 4월 15일 발족한 시민방사능감시센터(소장 이윤근)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아이의 생존이 걸린 일인데, 가만히 있을 셈인가”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수습되기는커녕 여전히 대량의 방사능을 내뿜어내는 현재진행형 재앙이다. 하지만 위기감은 눈에 띄게 줄었다. 부모, 특히 여성들만이 아이들을 방사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데 노심초사하는 것 같다. 헬렌 캘디콧은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에서 아이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오염된 음식을 먹이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방사선에 20배나 민감하다”며, 후쿠시마 사고로 장래에 아이들이 입게 될 건강 피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헬렌 캘디콧은 회복 불가능한 방사능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핵발전소를 즉각 폐쇄하고 평화적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처방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에서 23기의 원전이 가동되고 11기를 추가로 건설하거나 계획중인 ‘미친 짓’은 당장 중단돼야 한다. 연일 언론을 통해 고조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염두에 두고선 “(한국의) 원자로로 비행기가 추락한다든지 미사일이 투하된다면 후쿠시마 사고보다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군사적 자극의 중단을 주문했다.
헬렌 캘디콧은 “의사로서 경고하는데, 후쿠시마 사고는 의료보건적인 재난이다. 한국 시민들도 원자로 폐쇄와 일본산 식품의 수입 중지에 나서야 한다. 여러분 주위의 시민들을 교육함으로써 사회적 안전 의식을 높여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기 주저하는 엄마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부모의 역할을 묻는 한 여성 참가자의 질문에 그는 “사고가 나기 전에 핵발전소를 폐쇄해야 한다. 아이의 생존이 걸린 일인데 가만히 있을 셈인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사자가 새끼를 보호하듯 말이다”라고 답했다. 방사능의 위험성을 무시하는 지인에게 어떻게 이야기할지 난감하다는 고민에는, “친절함을 버려라”면서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가지라고 조언했다.
감추려는 정부와 행동하는 시민들
이어 진행된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방사능 위험 시대에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소리가 높았다. 특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왜 시민들이 나서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현재 피난구역 설정의 기준이 되는 피폭량은 20밀리시버트(mSv)다. 법령에서 정한 일반인의 연간 피폭선량인 1밀리시버트 기준은 물론, 일반인의 출입이나 18세 미만자의 노동을 엄격히 금지하는 ‘방사선 관리구역’의 기준인 5밀리시버트보다도 4배나 높다. 이 기준을 아이들에게 적용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분노한 부모들이 일본 문부과학성을 압박하자 일본 정부는 학교 시설에 대해선 더 엄격한 기준을 세우겠다고 물러섰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어린이에게서 암 발병률의 증가를 확인했지만, 방사능 피해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핵발전소 주변 3만8천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에게서 소아 갑상선암이 발견됐다. 이는 일본 15~19세의 평균 발병률에 비해 4배 이상 높다. 하지만 방사선과의 연관성은 인정되지 않았고, 그에 따른 건강대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쓰다 칸나 ‘지구의벗 일본’ 대표는 “핵발전소 사고와 인과관계를 떠나 상황의 심각성이 분명하지만, 정부는 즉각 대응하지 않고 있다”며, “정부는 후쿠시마현 주민을 대상으로 한 ‘건강관리조사’의 목적을, 애초부터 방사선 피폭영향에 대한 규명이 아닌 ‘불안 해소’로 삼았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 조사는 갑상선암만을 다룰 뿐 ‘다른 질병은 나오지 않는다’고 전제했다. 게다가 정보공개 규정도 없어 관련 회의는 비밀에 부쳐졌다.
아이들이 실제로 처한 방사능의 위험을 조사하고 피폭량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행동의 변화를 유도한 것은 정부가 아닌 시민 스스로였다. 2011년 5월, 후쿠시마에 거주하는 아이 10명을 대상으로 한 소변 검사 결과 전원에게서 방사능 세슘이 검출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마이니치>나 <가디언> 등 일본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 조사를 진행한 이들은 후쿠시마 부모들로서, 아이들의 내부 피폭량을 검사하기 위해서였다. 조사에 참여한 아이들은 피난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후쿠시마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내부 피폭 사실을 알게 된 부모들은 아이를 야외에서 활동하게 한 것에 대해 큰 책임을 느꼈다. 정확한 정보만 있었더라도 아이들을 피폭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을 것이란 후회였다.
자발적 방사능감시 활동은 식생활의 개선 등을 통한 피폭량 저감으로 이어졌다. 심포지엄에서 아오키 카즈미사 일본시민방사능감시센터 부이사장은 4세 여자아이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 아이는 2011년 9월에 검사를 받은 결과 리터당 4.64베크렐의 세슘이 검출돼 지금까지의 측정치 중 최고를 기록했다. 어머니가 큰 충격에 휩싸였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곧 자신을 추스르고 식재료에 주의하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7개월 뒤에 이루어진 추적조사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아이의 방사성 세슘 피폭량은 0에 가깝게 떨어졌다. 아오키 부이사장은 “방사능 오염을 측정하고 감시하는 일은 시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 ‘시민방사능감시센터’ 발족
이날 발족한 시민방사능감시센터는 녹색병원, 두레생협연합회, 에코생협, 차일드세이브, 한살림연합, 행복중심생협연합회, 환경운동연합 등 7개 단체가 뜻을 모아 세운 국내 최초 민간 방사능감시센터다. 시민방사능감시센터는 아이들을 방사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선 정부에 기댈 수 없다고 깨달은 부모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들은 간이 방사능 계측기를 가지고 식품을 비롯한 가족의 생활 전반에서 오염을 측정하고 이를 공유해왔다.
공기와 식탁이 방사능에 오염되면서 시민들의 우려는 커졌지만 “한국 정부는 이러한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에 급급했고, 자발적으로 이 문제를 감시하고 해결해나가려는 시민들의 행동을 폄하”하기까지 했다. 발족선언문에서 밝혔듯 시민방사능감시센터가 “시민의 입장에서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역할”을 자임하게 된 이유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뒤 한국에서도 시민방사능감시센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많은 이들이 모금에 참여해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전문적인 핵종분석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시민방사능감시센터는 시민 참여와 자료의 투명한 공개를 운영 원칙으로 내걸고 ▲어린이 민감 계층의 먹거리 ▲생활 방사선 ▲일본 등 방사능 오염 국가의 수입품 등을 우선 대상으로 조사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인 동시에 정부 정책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김혜정 시민방사능감시센터 운영위원장은 활동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단순히 방사능 기준치를 강화시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낮은 방사선이라도 안전하지 않다는 관점에서 진정 국민을 보호하도록 정부의 철학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행일 : 20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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