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탈출과 피난 기록
지난 3월 19일~24일, 아시아 지역 반핵운동 네트워크 모임인 반핵아시아포럼이 서울, 부산, 삼척 등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 발표로 한국을 방문한 후쿠시마핵발전소 자주피난민인 우노 사에코(宇野 朗子)씨를 3월 22일, 서울 숙소에서 만나 피난과정과 생활에 대해 들어보았다.
인터뷰·정리=고노 다이스케 준비위원
다섯 살 아이의 엄마, 우노 사에코 씨
지금 딸은 다섯살이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자연에 뿌리내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연농업이나 지역통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후쿠시마의 심오함과 매력을 새롭게 느꼈다. 사고 당시는 농사를 지으면서 살 수 있는 곳을 이이타테무라 등에서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2010년 3월에 반핵운동을 시작했다. 2월에 사토 유헤이 후쿠시마현 지사가 이전에는 거절했던 플루서멀(통상적인 우라늄 원료에 플루토늄을 혼합해 더욱 위험한 핵원료-편집자 주)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해, 위기감을 느껴친구들과 함께 현청 앞에서 항의행동을 시작했다.
3.11 지진―쓰나미―정전―핵발전소 긴급정지
3.11에는 후쿠시마 시내에 있었다. 딸이랑 친구 집 앞에서 지진을 맞았는데, 날뛰는 말을 타는 것 같았다. 차가 튀고 돌이
무너져 차에 부딪치고, 땅이 울리고 전선이 흔들렸다. 마당의 우드텍 밑으로 딸을 들여넣고 나도 머리를 넣고,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했다.‘ 드디어 일어나고 말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지진이 가라앉은 후 그대로 그 친구 집에 피난했다. 다행히 그 집은 무너지지도, 정전되지도 않았다. 여진이 계속됐다. TV를 켜니 핵발전소 소식은 없고 오로지 쓰나미 소식만 보도되고 있었다. 예상되는 쓰나미 높이가 계속 높아지기만 해서 핵발전소가 지진을 견디더라도 쓰나미로 파괴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가 핵발전소가 긴급정지됐다는 정보를 접했다. TV에서는 괜찮다고했지만 활동경험상 정부와 언론
이 정보를 숨긴다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괜찮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핵발전소의 노심용융과 피난 결정
인터넷에서 메일로 정보를 계속 수집했다. 오후 5시 경에 냉각기능이 멈춰 후쿠시마로 전원차량이 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 때 나는 노심용융이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급히 전화를 걸었다. 기계치라서 이전에는 휴대폰도 없었는데, 지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마침〈폐로액션 후쿠시마(이하 폐로액션)〉 사무국장이 내게 휴대폰을 갖고 다니게 했다. 사무국장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가 있는 오오쿠마마치에 사는데, 다행히도 전화가 연결됐다. 내가얻은 정보를 전하고 피난하라고말하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그 후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피난했다.
친구 집에는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성인여성과 여덟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날 밤은 같이 있기로 했다.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집주인 친구의 남편은 병원에서 근무 중이라 돌아올 수 없었다. 또 다른 친구의 가족들은 이이타테무라(나중에계획적피난구역으로 설정됨)에 있었다.
남편과는 밤에 통화가 되었는데, 사이타마에서 멈춰버린 신칸센 안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에게 발전소 상황을 전했더니 바로 피난가는 게 좋다고 해서, 마음을 먹었다. 결정적으로 정부에 제출됐다는 노심용융 예측 시·계열표를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고, 밤 11시 쯤 나는 이메일로 그 정보를 확인했다. 이미 노심용융이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료대로라면 노심용융 시작예측 시간까지 1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밤의 긴박한 상황…피난, 서쪽으로
그것을 두 친구에게 보여주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떤 상황이 돼 있을지 모르니 지금 바로 멀리 떠나자고 제안했다. 두 친구는 남편이 같이 없어 결심하지 못했다. 이이타테무라 친구는, 가족이 정전 때문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고 있다고 걱정하며 결국 아기 셋을 데리고 돌아갔다. 지진으로 도로 상황이 어떨지 알 수 없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그 다음 날 아침에 피난했다고 한다.
남은 우리 두 사람은 먹을거리, 틈을 봉하기 위한 천 테이프, 비옷 등 생각나는 물건들을 모두 차에 싣고 아이들 다섯과 함께 밤 12시경에 출발했다. 남쪽은 길이 크게 함몰돼 갈 수 없어, 눈이 내리는 가운데 서쪽을 향했다.
새벽 3시쯤 아이즈와카마쓰에 살면서 〈폐로액션〉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본인은 도쿄에서 지진을 겪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그 사람이 운영하는 교회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딸 부부가 방을 따뜻하게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장난감이 많아,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소리 지르며 놀기 시작했다. 두 엄마는 완전히 지쳐 버렸는데….
남편이 렌트카로 합류해 그 날 오후 2시에 우리는 먼저 교회를 떠났다. 우리 가족은 니가타에서 비행기로 오사카로, 오사카에서 신칸센으로 히로시마로 갔다. 다음 날, 야마구치현 우베에 있는 시댁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인터넷과 전화로 피난하라고 호소했다.
후쿠시마에 남은 사람들
우베에는 4월 초순까지 머물렀다. 후쿠시마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몇 주나 계속 보고 있으려니 고통스러웠다. 피난해야만 하는데 정부가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기 때문이다. 3월 20일부터는 야마시타 슝이치(山下俊一) 교수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강연 내용이 너무나도 한심해서,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전자우편으로 비판글을 보냈더니 강연을 들은 가까운 친구가 감정적으로 반발하는 메일을 보내 왔다. 야마시타의 이야기를 믿고 있는듯했다. 그 교수의 이야기를 믿어야만 하는 절박한 심리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야마시타 교수에 대한 비판들은 유언비어로 취급됐다.
우리는 후쿠쓰시로, 남편은 도쿠시마로…
당시 자주피난민을 수용해 주는 곳은 거의 없었는데, 규슈대학이 수용을 표명했기 때문에 나는 딸과 함께 후쿠오카에 있는유학생기숙사로 들어갔다. 딸이 대도시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해 곧 후쿠쓰시(후쿠오카 인근도시)로 옮겼다. 온라인을 통해이재민에게 무료로 빌려주는 집을 구했다.
남편은 이번 3월에 후쿠시마에 있던 직장에서 나와 지금은 도쿠시마에서 일하고 있다. 앞으로 2년 정도는 따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은 후쿠쓰시에 살면서 후쿠시마에 남은 동지들과 함께 〈폐로액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피해자의 권리가 명기된 법·제도 마련과 형사책임을 묻는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또 이주할 곳을 찾아 주말이면 30명 정도가 함께 농촌 등을 돌아보고 있다.
자주피난민은 보상받지 못한다
자주피난민에 대한 보상이 없다는 것은, 자주피난이 사회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도쿄전력 직원에게서 “사고는 최악에 이르지 않았고, 건강피해는 앞으로도 있을리 없다. 자주피난민은, 안전한데도 불구하고 멋대로 도망친 사람이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보상받지 못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배상은 경제적인 문제보다도 자주피난의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정당성이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친구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피난하길 바라지만 내가 설득할 수도 없다. 사회가 이전과 똑같
이 움직이면, 혼자만 거기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자주피난민에게도 배상 절차가 시작되었고 나에게도 연락이왔다. 제시금액은 원자력손해배상분쟁심사회가 계산한 것보다 많지만, 실제로 피난으로 들었던 비용의 1% 정도다. 이 절차가 진행됨으로써 ‘이미 받았다’는 꼴이 돼서, 본래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가 무시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국은 후쿠시마 전야
한국의 고리핵발전소에서 일어난 일은 후쿠시마와 똑같다. 후쿠시마 전야라고 절실히 느낀다. 2010년 6월에 나는 처음으로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를 방문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진도5의 지진이 일어났다. 무서웠다.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때 핵발전소가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핵발전소에“ 아니오”를 말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 4일 후에 또 외부전원이 모두 상실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수위가 2m나 낮아져 노심용융 될 수도 있었다. 이 사고의 의미를 알린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도쿄전력은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매뉴얼 항목만 몇 개 추가하고 재가동시켰다. 우리는 항의했지만 항의가 있다는 사실마저 보도되지 않았다. 후쿠시마현도 기초자치단체도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정말로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은 현재의 핵발전 추진 흐름을 꼭 멈춰야 한다. 후쿠시마 상황을 제대로 보고 그 경험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고는 그 때까지의 삶을 몽땅 빼앗는다. 한편으로 전야에 있다는 것은 희망이기도 하다. 사고가 아직 일어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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