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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원자력 유토피아’

∥ 책 소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원자력 유토피아

 

- 홍덕화 충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1950년대 상업용 핵발전이 구체화되면서 핵에너지 이용에 대한 무모하리만치 낙관적인 기대가 확산되었다. 핵 추진 자동차인 포드 뉴클레온(Nucleon)원자력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일 따름이다. 물론 상상이 곧 현실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원자력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기후위기의 대응 수단이자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원으로서의 핵에너지에 대한 열망은 지금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원자력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이 미래를 겨냥하고 과거를 지운다는 점이다. 과거는 원자력 유토피아에 내재한 불편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플루토피아: 핵 재난의 지구사』(케이트 브라운, 우동현 옮김, 2021, 푸른역사)

 

 

플루토피아는 플루토늄 공장이 있던 미국 리치랜드(Richland)와 러시아 오죠르스크(Ozersk)를 오가며 원자력 유토피아가 사실은 위험과 차별, 피해가 켜켜이 쌓여 있는 원자력 디스토피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체제 경쟁의 최전선에서 리치랜드와 오죠르스크는 플루토늄 생산을 토대로 풍요로운 도시를 꿈꿨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사고는 반복되었고 건강 피해가 감지되면서 주민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안정적인 일자리와 후한 정부 보조금이 제공되고, 높은 수준의 복지와 소비의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위험에 둔감하고 풍요에 익숙한 플루토피아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전 세계 곳곳의 핵발전단지에서 엿볼 수 있는 풍경이다. 플루토피아에서 리치랜드와 오죠르스크를 넘어 다른 지역들이 연상되는 이유다. 그러나 플루토피아가 그리는 풍경은 조금 더 입체적이다. 이 책은 원자력 유토피아가 만들어낸, 그러나 공식적인 역사에서 지워버린 차별과 배제, 위험과 피해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단적으로 리치랜드와 오죠르스크의 풍요는 도시 밖의 이주 노동자, 소수 민족, 군인, 죄수 등에 의해 지탱되었다. 이들은 위험한 일을 떠맡음으로써 플루토피아의 풍요를 떠받쳤다. 보상은커녕 역사 속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채.

 

한편 플루토피아가 만들어낸 장벽은 풍요를 보장하는 경계가 되었지만, 방사성물질의 이동을 차단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방사성물질은 토양에서 음식으로, 대기에서 폐로, 혈류로, 골수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DNA로 이동하여 이제 신체 자체가 핵폐기물 저장소 역할을 했다. 그렇게 피해는 플루토피아 밖의 몫 없는 이들에게 누적되었다.

 

플루토피아의 후반부는 피해를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추적하는데, 탈핵 운동이 풀어야 할 난제들을 떠오르게 한다. 두 가지만 꼽자면, 먼저 플루토피아에 내재한 차별과 배제는 피해의 가시화를 한층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핵시설 내 위험한 노동이 단기 임시직 노동자들에게 집중된 탓에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의 피폭 피해를 추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상처 입은 몸과 경험으로 전문지식에 맞서야 하는 어려움은 몸과 경험의 유실로 한층 더 높은 장벽에 부딪쳤고, 피폭 피해의 체계적인 저평가로 이어졌다플루토피아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오염이 새로운 기회로 재구성되는 모습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예컨대, 리치랜드에서는 지역경제 악화를 빌미로 핵폐기물 저장소 유치 요구가 나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사선으로 오염된 환경을 보조금을 받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기회로 여기는 이들이 늘었다. 소련 해체 이후 오죠르스크에서는 오염된 환경을 매개로 해외 보조금을 확보하는 것이 도시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플루토피아가 남긴 오염으로 플루토피아를 연명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의 플루토피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유사한 논리가 관통하지만, 조건이 다른 만큼 플루토피아를 한국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플루토피아 지도가 변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주 대책, 주민 건강 영향조사, 피폭 노동자 관리체계 등을 제대로 실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덧붙여 사용후핵연료의 부지 내 저장시설로 인해 플루토피아로 가는 길이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면 정의로운 전환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제들 모두 핵 시설 내부의 노동자와 최인접 마을 주민, 해당 지자체와 주변 지자체, 국가를 아우르는 한국의 플루토피아 지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까다로운 과제로 남겠지만, 플루토피아가 보여주듯이, 역사를 다시 쓰는 것에서 지도의 한 조각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탈핵신문 2022년 3월(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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