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운동, 탈성장과 전력수요의 관계에 주목하자
이정필(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최근 탈성장을 예고하는 책들이 많이 소개됐다. 올 초에 리처드 하인버그의 《제로 성장의 시대가 온다(부키, 2013)》를 읽으면서 당시 논란 중이던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정부의 ‘원전사랑’과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의지박약, 전력시스템의 공공성 포기, 의사결정 구조의 폐쇄성도 문제였지만, 경제성장을 신봉하는 불치병에 특히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경제성장 제일주의는 차지하더라도, 운동진영의 소극적, 단기적 대응 태도에는 심대한 문제가 있었다.
전력계획이든 에너지계획이든, 모든 국가계획은 경제성장률을 전제한다. 대부분의 환경운동과 탈핵진영은 심정적으로는 이런 기준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탈성장의 논리를 실천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걸맞게 활동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독일처럼 경제성장 추세를 유지하면서도 탈핵을 선언하고 실행에 옮기는 국가도 있다. 그만큼 경제성장과 에너지 사용이 정비례하지 않도록 하는 조정국면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를 뒷받침했던 것은 다름 아닌 30년 넘게 승리와 패배를 경험하면서 가열차게 전개된 탈핵운동 등의 사회운동의 역사적 성과 덕분이었다.
우리도 열심히 투쟁하면 독일처럼 탈핵의 길에 접어들 수 있을까? 대답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대답은 ‘그렇다’이다. 운동권의 도덕률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대답은 ‘글쎄올시다’이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만성적인 금융위기는 경제성장의 출구전략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 봉합될 수 없는 생태―사회적 한계의 전조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담론이 탈성장이다. 탈성장은 단지 고용 없는 성장이나 경기 순환의 주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현 체제의 근본적 재편을 예고하는 분석이자 동시에 체제의 근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지침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탈성장과 전력수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영국 NGO인 ‘코너 하우스’가 펴낸 《에너지 안보》에서 밝힌 것처럼, 지난 150년 동안의 에너지 수요예측은 에너지 사용의 다양성과 전환, 특정 에너지원의 특수성과 물질성, 혁신의 예측 불가능성과 정치적 경제적 변화 등을 고려하지 않아서, 거의 항상, 그것도 크게 틀렸다. 이렇게 경제성장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 않은 채 에너지원과 에너지 효율만 따진다면, 우리는 결국 쳇바퀴 도는 다람쥐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다른 수리적 모델을 이용해 합당한 전력 수요를 계산하려 해도 현재와 같은 방식의 수요예측과 경제성장 프레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 시도는 더 이상 급진성을 상실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생각의나무, 2011)》에서 앙드레 고르가 명쾌하게 설명한 부분을 바꾸면 이렇다. 전력예측의 연구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가정에 기초하여 수행된다. 사회나 생산·소비·생활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 복종하는 사람과 명령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고, 전력 네트워크의 단말기에서 소비자들이 전기코드를 꽂고 전기제품의 전원을 켜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논의 과정에서 몇몇 탈핵 인사들이 2035년까지 ‘핵발전 비중’을 조정하려 노력하고, 계획 합리적이든 시장 합리적이든 합리적 전력구조를 지향하더라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달리는 〈설국열차〉의 운명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2035년까지의 적정 핵발전 비중에 대한 워킹그룹의 검토의견으로 전력설비용량 기준 7%를 제시했다는 것이 아무리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매트릭스〉의 가상과 현실 간의 일시적 정전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전력수요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기요금의 대대적인 개편 등 가격정책의 변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해야 한다. 녹색사회의 준거점인, 사회적 필요를 기반으로 생산과 소비를 결정하는 전복적 기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전력을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상상력과 운동력이 절실하다.
이런 차원에서 탈핵 에너지 전환을 실천하는 지역적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 에너지 총량제’와 ‘지역 재생에너지 자립’ 프레임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정책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이슈 페이퍼 2호, 2012. 3. 27)는 지역 에너지 자립도를 최소한 2030년에 30%, 2050년에 60% 달성을 규범적 목표로 제시하였다. 지역에너지공사, 에너지협동조합을 비롯한 녹색 사회적 경제 등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조직적 형태도 구상할 수 있다.
언제부터 ‘에너지 위기’라는 말을 흔하게 듣는다. 그런데 위기의 진짜 위기는 위기의 원인을 잘못 진단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실패가 아니라 더 ‘나은’ 실패가 아닐까? 민주적 참여계획과 같은 새로운 접근은 더 큰 노력을 요하지만, 그 이상의 창조적 성과로 연결될 수 있다. ‘밀양 전투’가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제2의 경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태민주주의의 승리로 살아있는 ‘부안 항쟁’을 계승하는 것도 이러한 전복적인 에너지 정치로 가능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밀양 사태’ 역시 국가 부의 성장으로, 즉 파괴가 부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국민총생산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발행일 : 2013.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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