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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활동은 민중들의 긴 역사 중 한 부분”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 인터뷰


“내 활동은 민중들의 긴 역사 중 한 부분”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


2020년 반핵아시아포럼을 한국에서 열기 위한 논의를 위해 사토 다이스케(62)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이 11월 한국을 방문했다. 사토 씨는 서울, 광주, 울산, 부산을 순회하며 한국의 탈핵활동가들에게 반핵아시아포럼의 역사와 목표,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2020년 반핵아시아포럼이 한국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한국의 탈핵활동가와 단체들에게 검토를 요청했다. 광주, 울산, 부산에서의 통역은 오하라 츠나키 탈핵신문 편집위원이 맡았다.


사토 씨는 반핵아시아포럼 활동을 상세히 기록해 왔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궁금했다. 사토 씨와 개인사를 포함한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 5·18 광주항쟁 소식 접하고

조선어학과 학생 70명 단식 투쟁

 

사토 씨는 사형 판결을 받은 김지하 시집을 1976년 즈음에 우연히 일본 서점에서 접했다. 사형수의 시집이라고 해서 그 책을 샀으나 한국의 정치 상황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사토 씨는 그 시집을 읽고 1977년에 오사카 외국어대학의 조선어학과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화염병도 던지고 과격파 학생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운동으로는 사회를 바꾸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한 시기가 2년 정도 흘렀다. 그러던 중 1980년 일본 대학가에 한국의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사진과 영상이 들어왔다. 여러 대학이 806월부터 한국의 광주항쟁에 관한 상영회를 시작했다. 독일 기자(위르겐 힌츠페터)가 광주항쟁을 직접 기록한 영상이었다.


그 와중에 김대중 씨의 사형선고 소식을 들었다. 사토 씨는 김대중을 비롯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당시는 전위파 일부의 지도하는 사람들이 운동의 중심이던 시기였다. 사토 상은 그런 방식이 아닌 스스로 행동하는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는 조선어학과 학생 70명 정도의 학생들과 단식투쟁을 했다. 김대중이라는 사람 한 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같은 연배의 학생들이 광주에서 탄압받는 것을 알리고 저항하는 행동이었다. 김대중이 사형되면 한국에 암흑의 시대가 올 것이고, 그러면 광주시민이나 학생들을 두 번 죽이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는 광주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소중히 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명 동조 단식 사례는 일본 대학가에 거의 없었던 새로운 운동이었다고 한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 잡지 <세계> 등이 주목했다. 사토 씨는 나와 70명의 학생은 본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항의하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일본의 항만노조도 한국의 5.18 문제를 가지고 1일 총파업을 했었다고 한다.

 

전 항만노조에 취업

피폭노동 현장에 일자리 알선 안 하는 합의

 

사토 씨는 1981년 항만노조에 취업해 니시나리 노동복지센터에서 일했다고 한다. 오사카에 있는 가마가사키에는 2만 명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었고, 슬럼가 같은 곳이었다. 니시나리 노동복지센터는 오사카광역지자체(오사카부)의 출자법인으로 공무원노조가 아닌 전 항만노조 소속이다. 건설업, 일용직 등 여러 업종이 항만노조에 참여했다.


사토 씨는 복지센터에서 노동자 일자리 알선, 산재 상담, 체불임금 상담 등의 업무를 했다. 노동자 상담 중에 피폭노동에 대한 상담이 꽤 많이 있었다. 피폭노동자들은 주로 단순노동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핵발전소 계획예방정비기간에 청소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노동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오사카부 공무원과 같이 일했다. 사토 씨는 오사카부와 교섭해 1982년도에 많은 피폭을 당하는 현장에는 노동자 파견을 보류하겠다는 합의를 했다. 그 합의는 지금도 유지된다고 한다. 공공의 직업소개소가 방사선 작업 관련 일자리 소개를 하지 않는 주요한 성과였다.

 

일본서 해고철회 요구 한국노동자 투쟁에 연대

 

일본의 노동조합운동 중 특히 좌파쪽 노조운동은 경제투쟁뿐만 아니라 반전·반핵무기·반핵발전소 운동을 함께 하고, 한일연대 투쟁도 하고 있다. 사토 씨는 1980년대에 전 항만노조의 운동으로 핵발전소 반대 운동, 한국노동자들과의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공장을 철수하자 한국노동자들이 일본까지 가서 해고철회 투쟁을 했다. 당시 강동지역에 있는 스미다 기업, 간사이시코쿠 지역의 아시아스와니라는 회사 상대로 한국 노동자들이 해고철회 투쟁을 했고, 사토 씨는 이 투쟁에 연대했다.

 

1989년부터 반핵운동 국제 연대


사토 씨는 1990년대 이후에는 노동조합 운동보다 반핵운동에 집중했다고 한다일본 각지의 핵발전소 현지에서는 핵발전소 반대운동하는 사람들한테서 배울 점이 많았다.

 

△ 사토 씨가 울산의 탈핵활동가들에게 반핵아시아포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토 씨와 이상범 울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왼쪽에서 두변째)은 이미 2000년대에 울산 신고리 3~4호기 반대투쟁으로 인연을 맺은 사이다. ⓒ용석록
 


한국 반핵운동과의 교류는 1989년부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 핵발전을 수출하려고 했다. 그 당시 아시아지역 원자력협력 국제회의를 일본이 중심이 돼서 진행하고 있었다. 아시아 각국에 핵발전이 추진될 수 있도록 일본 원자력산업회의가 그 일을 주도했다. 일본 원자력산업회의는 핵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주민수용성 확보 노하우 등을 다른 나라에 가르쳐주었다. 그런 영향으로 한국의 원자력홍보관은 일본의 홍보관과 똑같이 생겼다.


그즈음 한국의 반핵활동가로부터 핵발전 반대 국제연대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사토 씨는 핵발전 추진파가 국제교류를 활발하게 하니 반대파도 국제연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반핵활동가와 교류했고, 그것이 반핵아시아포럼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 앞장서 반핵아시아포럼 개최

 

첫 반핵아시아포럼은 일본에서, 2회 반핵아시아포럼은 한국에서 열기로 했다. 사토 씨는 일본의 여러 네트워크와 논의해 반핵아시아포럼 실행위원회를 만들었다. 1회 반핵아시아포럼은 1993년 일본에서 열렸고, 아시아 각국의 30명 정도를 초대해 4명이 한 팀을 이뤄 7개 코스에서 4일 동안 28번의 집회를 진행했다. 반핵아시아포럼은 항상 현장을 중요시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세웠다


2회 반핵아시아포럼은 1994년 한국에서 열렸다. 대회 참가자들은 영광, 고리, 울진의 반핵집회에 참가하고, 핵폐기장 반대싸움을 하는 고성과 영일 집회에도 참여했다. 이후 반핵아시아포럼은 거의 매해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지금까지 열리고 있다.

 

운동적인 철학


사토 씨는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에 일본기업이 한국을 착취하는 상황이 있었다사토 씨는 일본이 한국의 독재정권을 지탱하고 있다고 여겼다일본이 한국 등 아시아 민중들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가 있다고 판단했고일본 사람들은 풍요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또 핵발전은 일용직 노동자의 피폭가난한 마을에 대한 착취 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며도시민들은 어쩌면 가해자에 속할 수도 있는 핵발전소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환경운동이 아니라민중들의 긴 역사 중 한 부분을 이어간다는 생각으로 활동한다.

 

△ 사토 씨는 1992년부터 반핵아시아포럼 통신을 지금까지 만들고 있다. 사진은 사토 씨가 한국 활동가들에게 반핵아시아포럼 역사를 설명하는 장면인데, 그는 한국인을 위해 한글 번역본 자료를 들고 방한했다. ⓒ용석록
 


그는 일본의 핵발전 정책으로 방사능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가해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맥락 속에 일본이 다른 나라에 핵발전소 수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활동도 했다. 그는 일본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1992년에서 2018년까지 인도네시아·대만·베트남·인도·터키에의 핵발전소 수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했다. 서명 운동, 미쓰비시·히타치·도시바의 제품불매운동, 국회에서 질문, 정부와 교섭, 대상국에서 활동가를 불러서 집회, 대상국에 방문해서 집회 등의 방식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이 해온 일 중 한 부분을 자신이 하고 있을 뿐이며, 자신의 이름은 남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핵발전소도 핵무기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봉건주의가 무너졌듯이 자본주의도 끝나게 될 것이라며, 그 이후 어떤 세계가 이어질 것인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할 과제가 있다며 말을 마쳤다.


사토 씨는 제1회 반핵아시아포럼이 열리기 전해인 19928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반핵아시아포럼 통신을 만들고 있다.


통역 : 오하라 츠나키 편집위원

인터뷰와 정리 : 용석록 편집위원

탈핵신문 2019년 12월(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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