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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울산(고리,신고리관련)

“피폭이라는 불안을 품고 일한다”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부산·울산 강연

 

524()25()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일본활동가 2명이 부산과 울산에서 강연을 했다. 한 분은 피폭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가로 이미 여러 차례 방한한 나스비 씨였고, 다른 한 분은 후쿠시마에서 직접 제염작업과 수습작업에 참여한 이케다 미노루 씨였다. 20113월 도쿄에서 우체부로 일하다가 후쿠시마 참사를 맞은 이케다 씨는 정년 퇴임 후 작업원으로 후쿠시마에 갔다. 13개월 동안 후쿠시마에서 일한 체험을 후쿠시마 핵발전소 작업원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작년에 책도 출간했다.

우체부로 퇴임한 이케다씨가 핵발전소 사고 현장까지 가서 일하게 된 심정과 엄혹한 현장에서 일하는 피폭노동자들의 실태를 사진과 함께 기록한 책이다. 후쿠시마에서 일한다고 특별히 급료가 높은 것도 아니라는 얘기에, 많은 이들이 그런데 왜 후쿠시마에서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아래는 이케다 씨와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을 정리했다.

 

524()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에서 탈핵부산시민연대 등이 주최한 일본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나스비 초청강연과 핵발전 비정규노동 실태조사 보고가 있었다

 

어떻게 후쿠시마로 가게 되었나?

도쿄에서 나고 자라 도쿄전력의 전기를 쓰며 살았다. 그런데 도쿄로 전기를 보내주던 후쿠시마핵발전소가 어떤 상황인지,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언론에서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후쿠시마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싶었고, 직접 가서 눈으로 보며 체험코자 했다.

 

무슨 일을 얼마나 했고, 노동 강도는 어떠했나?

직업소개소에서 60세를 넘겼다고 처음엔 핵발전소가 아닌 제염작업을 추천했다. 그런데 수습작업원이 부족해져서인지 나중에는 핵발전소에 가게 되었다. 제염작업은 주로 풀베기를 했고 8시간 일했다. 핵발전소에서는 청소를 하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방호복 등을 포대에 담는 일을 했다. 그런데 너무 힘이 들어 2시간 정도면 한계가 왔다. 세 겹의 방호복과 전면마스크를 쓰면 땀복을 입은 것처럼 더웠다. 복장 자체만으로도 힘들고 긴박감이 컸다. 점심시간과 휴게시간이 있어도 생략하고 얼른 할당량을 마치는 게 나아, 쉬지 않고 일하기도 했다. 도시락은 주로 화장실차 조수석에서 먹었다. 제염작업과 수습작업은 2014년과 2015년에 걸쳐 13개월 일했다.

 

보수는 어떠했는가?

도쿄전력이 발주할 때 정해준 위험수당 2만엔은 여러 겹의 하청을 거치면서 내가 받은 위험수당은 4천엔으로 줄었다. 다른 복지수당은 아예 0원이다. 작업원들은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고, 작업원들끼리는 이상하다고 숙덕거리면서도 당장 그만 둘 게 아니면 상사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 번은 도쿄전력 직원이 작업자들에게 위험수당 못 받고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피폭노동을 했는데 피폭은 어느 정도이고 두려움은 없는가?

6.13밀리시버트(mSv) 피폭을 당했다. 일본 산업재해 기준이 백혈병은 5밀리시버트 피폭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발병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어느 화장실 벽에서 발견한 낙서가 피폭노동자들의 심경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후쿠시마제1발전소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내 몸은 병들어가고 있다.”

 

그만두고 책을 내게 된 계기는?

허리에 무리가 되는 작업으로 바뀌면서 힘들었다. 2일 쉬던 주말도 하루 밖에 쉴 수 없게 되어 그만두었다.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는 매일 작업원으로 불리는 6~7천명의 인부들이 투입되고 있다. 앞으로 50년 동안 몇 백 만 명의 작업원이 필요할 것인가? 모두 피폭이라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일한다. 점점 새로운 피폭자를 낳고 있는 국가사업이 되어버렸다. 사고 5년을 넘기면서 침묵하던 작업원들도 목소리를 낼 때가 되었다. 일상의 노동조건과 복리후생, 피폭 문제점 등을 개선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직장환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탈핵신문 2017년 6월호 (제53호)

김복녀 통신원(원불교환경연대 탈핵정보연구소)